[이 아침에] 깍깍 까치가 울면
까치가 운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이웃 지붕 꼭대기에서 까치 세 마리가 깍깍 소리 내 운다. 검은색 부리와 굽은 등이 비단결처럼 광택이 난다. 어깨와 긴 날개깃은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하얗다. 오늘은 반가운 사람이 오시려나. 누구를 위해, 무엇을 바라며 까치는 저리도 목청 높여 울고 있는 것일까. 까치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새다. 예로부터 아침에 까치가 울면 귀한 손님이 찾아온다고 한다. 까치는 좋은 소식이 올 길조(吉鳥)로 여겨진다. 설날이 가까워지면 동무들과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 이래요.’라고 종달새처럼 노래 불렀다. 설날이 손꼽아 기다려지는 건 때때옷 입고 차례상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설 전날을 까치설이라고 부르는데 원래는 ‘작은 설’이라는 말이다. 국어학자의 말에 따르면 ‘까치 설’은 ‘작은 설’이라는 뜻을 가진 ‘아치 설’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작다’는 뜻의 ‘아치’에서 파생된 말이 세월에 따라 ‘까치’로 변형돼 ‘까치설’로 정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외로우면 모든 것이 그리움이 된다. 작은 몸짓, 스쳐 가는 미소, 다정한 눈길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불타는 사랑이 떠나간 자리는 이별의 상흔이 화석처럼 굳어있다. 목매어 불러도 한번 등 돌린 사람은 돌아서지 않는다. 다시 만날 기약이 영영 사라졌다 해도 못다 한 사랑은 그리움의 생채기로 남는다. 떠나오면 잊혀진다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흔적마저 희미해지고 종국에는 민들레 홀씨로 흩어진다 믿었다. 미국 온 뒤 까치가 우는 날엔 메일 박스로 달려갔다. 혹여나 바람결에 날라 올 그리운 사람들이 보낸 편지나 엽서를 기다렸다. 그리움은 그리워하는 사람의 몫이다. 까치가 울지 않는 날에도 우체부가 오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움이 서럽게 가슴 저미는 날엔 우체국 앞을 서성였다. 오늘 안 오면 내일은 사랑의 엽서가 날아 올 거야. 날 영영 잊어버리지는 않겠지. 사랑의 말들이 적힌 편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 기다림은 가슴에 작은 모닥불 지핀다. 기다림은 세월이 흘러도 어머니가 만드신 조각 이불처럼 삶을 따스하게 감싼다. 칠월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단 한 번 오작교(烏鵲橋)에서 만나는 날이다, 그 날은 까마귀나 까치를 볼 수 없다. 칠석날을 지낸 까치는 머리털이 벗겨져 있는데 오작교 다리를 놓느라고 돌을 머리에 이고 다녔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이제는 외로움으로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다. 까치가 울어도 까치가 울지 않아도 멍 때리며 메일 박스 곁을 서성이지 않는다. 외로움도 그리움도 서러움까지도 남은 인생 동안 견뎌내야 할 내 인생의 숙제다. 이젠 우체국 앞에서 바보처럼 헤매지 않는다. 돌아오지 못할 시간을 되새김질하지 않는다. 사랑은 어제의 물레방아에서 흘러간 물이다. 지나간 시간보다 다가올 날들에 열중하며 덜 아프게, 눈물 없이 살기로 한다. 첫사랑보다 진하고 애틋하며, 그리움보다 깊고 오묘한, 영혼의 밑바닥을 울리는 방울 소리로, 아직 살아 움직이는 뼈마디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까치가 울어도, 울지 않아도 살아있는 동안 그리움의 날개 접지 않으리라. 이기희 / Q7 Fine Art 대표·작가이 아침에 까치 까치 까치설날 오작교 다리 메일 박스